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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물info

아디다스 주식회사 브랜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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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디다스의 정의 및 기원


아디다스(adidas)는 바이에른(Bayern) 주의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 본사를 둔 독일의 스포츠 용품 제조 기업으로 1948년 아돌프 다슬러(Adolf Dassler)가 설립했다. 브랜드명은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성 다슬러(Dassler)를 결합한 아디다스(adidas)로 지어졌다. 세계 최초로 고무 바닥에 여러 개의 스파이크가 달린 축구화를 개발한 아디다스는 스포츠화뿐 아니라 가방, 시계, 아이웨어 등 다양한 스포츠 관련 상품들로 그 영역을 확장하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아디다스 그룹은 리복(Reebok)과 테일러 메이드(Taylor Made), 락포트(Rockport)를 소유하고 있으며 FC 바이에른 뮌헨(FC Bayern Munich)의 지분 9.1%도 갖고 있다.


2. 아디다스의 탄생 및 설립자


1900년, 아돌프 다슬러는 독일 헤르초게나우라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 공장의 봉제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아돌프 다슬러는 섬유 가공, 신발 세탁, 제단, 제본 등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당시 독일의 신발 산업은 하향세였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제빵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1920년 운동에 대한 열정이 강하고 자신 역시 운동 선수였던 아돌프 다슬러는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운동화 대신 내구성이 강한 운동화를 만들고 싶어 스무 살 때부터 어머니의 세탁실에서 혼자 트레이닝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4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집에 돌아온 형 루돌프 다슬러(Rudolf Dassler)는 동생의 신발 사업에 동참해 둘은 같은 해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Gebrüder Dassler Schuhfabrik)’을 설립했다. 훗날 아디다스의 전신이 된 이 회사는 아돌프 다슬러의 가족을 포함한 12명의 사람들이 매일 50켤레의 운동화를 제작하는 가내 수공업 형태였다.


아돌프 다슬러는 조용하고 꼼꼼한 신발 개발자였고, 형 루돌프 다슬러는 외향적인 성격의 세일즈맨이었기에 둘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회사를 운영했다. 아돌프 다슬러는 자신이 만든 제품들을 선수들이 착용하기 전에 늘 테스트를 직접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좋은 제품을 선수들에게 제공하겠다던 그의 신조(Only The Best For The Athlete)는 지금도 아디다스 브랜드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인 역시 열정적인 운동 선수였던 아돌프 다슬러는 선수들과 그들의 요구에 늘 귀 기울였다.

1924년 다슬러 형제의 신발 공장 창업 후, 다슬러 형제는 운동 선수들을 위한 최적의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아돌프 다슬러는 보다 더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저울을 들고 다니며 원단을 찾아 다녔고, 선수와 트레이너들을 직접 만나 자신이 만든 신발의 성능을 직접 테스트했다. 그 결과, 그는 딱딱한 가죽 대신 부드럽고 가벼운 고무 원단으로 대체해 운동화 제작에 사용했다. 이 고무 운동화는 아디다스 스포츠화의 효시였다.


1925년, 아돌프 다슬러는 직접 손으로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해 특허권을 갖게 되었다. 이 신발들은 트랙과 필드에서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는데, 특히 아돌프 다슬러의 스파이크 러닝화가 처음 빛을 본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였다. 리나 라드케(Lina Radke) 선수가 이 신발을 신고 여자 800m 달리기에서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1932년 LA 올림픽에서 아서 요나스(Arthur Jonath)도 이 신발을 신고 육상 100m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은 인기를 끌었다.


아돌프 다슬러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1928년 아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리나 라드케

아돌프 다슬러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1928년 아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리나 라드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독일 국가 대표 선수들 대부분이 아돌프 다슬러가 만든 운동화를 신었고, 독일 올림픽 위원회는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겠다는 선수들의 요구에 따라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에서 스포츠화를 공급받았다. 아돌프 다슬러는 이 당시 최고의 육상 스타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Jesse Owens)에게 자신의 운동화를 보여주기 위해 바이에른에서 베를린(Berlin)에 있는 선수촌까지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돌프 다슬러는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보여주며 경기에서 신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결국 제시 오언스는 이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해 베를린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됐다. 제시 오언스가 신었던 다슬러 형제의 신발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신길 원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다슬러 형제는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판매했다.


아돌프 다슬러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달린 제시 오언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 4관왕을 차지했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다슬러 형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심한 갈등을 겪었다. 1947년, 결국 다슬러 형제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루돌프 다슬러는 1948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푸마 슈퍼브릭 루돌프 다슬러(Puma Schhfabrik Rudolf Dassler)’라는 신발 회사를 세웠고(이는 나중에 푸마(Puma)의 전신이 된다), 아돌프 다슬러는 이듬해인 1949년에 5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성 다슬러(Dassler)를 결합한 아디다스(adidas)로 회사명을 바꿨다. 이것이 아디다스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3. 아디다스의 역사


1) 아디다스로 독립 이후 ~ 다슬러 가문의 경영 시대(1949~1989)

1949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 제화 회사를 대신하여 독일 축구 대표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된 아디다스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또 한 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서독 대표팀은 아돌프 다슬러가 만든 축구화를 신고 출전했다. 서독 대표팀은 조별 리그 2차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 팀에게 3대 8로 대패했다. 터키와 플레이오프(Playoff)를 치르며 힘겹게 8강에 오른 뒤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헝가리팀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서독의 우승을 점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변수가 생겼다. 경기가 벌어진 베른(Bern)에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경기 시작 이후 연속 두 번의 골을 넣어 주도권을 잡은 팀은 헝가리였지만, 폭우로 인해 그라운드가 진흙탕으로 변해가면서 축구화 바닥의 스터드(Stud, 징)를 교체할 수 있는 축구화를 신은 서독 팀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전반이 끝나고 스터드를 교체한 서독의 경기력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살아났다. 2대 2 동점이었던 후반 39분, 헬무트 란(Helmut Rahn)이 결승골을 넣으며 헝가리를 무너뜨렸다. 서독의 승리이자, 아디다스 기술의 승리였다.


패전국으로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후에 이 일화는 『베른의 기적(The Miracle Of Bern)』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영화에는 아돌프 다슬러가 축구화의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다는 걸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월드컵을 통해 아디다스는 축구 전문 브랜드로 급성장하게 되었고 독일 대표팀이 신었던 아디다스의 징 박힌 축구화(Sports Shoe With Screw-In Studs)는 전 세계적으로 주문이 쇄도해 한 해 45만 켤레 넘게 생산됐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디다스는 스포츠 의류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고, 1963년에는 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디다스의 텔스타(Telstar)가 공인구로 사용되면서 아디다스 축구공은 모든 FIFA 월드컵의 공인구로 채택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선수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스포츠 용품 분야에서 독주했다.


1978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돌프 다슬러의 뒤를 이어 다슬러 가문의 경영이 시작됐다. 아돌프 다슬러의 사망 6년 후 아돌프 다슬러의 아내 카데 다슬러(Kathe Dasselr)의 사망으로 그녀의 경영이 막을 내렸다. 이후, 아디다스 CEO 자리에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Horst Dassler)가 올랐다. 그는 스포츠 용품 전반으로 사업 범위를 무리하게 확장했고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아디다스 물품 독점 계약에 열을 올렸다. 아돌프 다슬러가 살아있었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던 호르스트 다슬러는 스포츠 신발 제작에 주력했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토털 스포츠 용품 사업으로 진출하려는 욕심이 많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을 피해 프랑스 법인으로 도망가다시피 했는데 이 때 호르스트 다슬러는 아레나(Arena)라는 수영 전문 브랜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아디다스의 CEO로 부임한 뒤 그는 전 방위적인 로비를 통해 FIFA 회장 및 IOC 위원 임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가 스포츠 정치에만 몰두한 사이 아디다스는 서서히 경쟁력을 잃어갔다. 그동안 전문 선수용 제품들 위주로 생산하던 아디다스는 대중들의 취향에 둔감해졌고 인건비가 높은 독일과 프랑스 공장에서 적자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1987년, 호르스트 다슬러가 사망하면서 다슬러 가문의 경영도 결국 막을 내렸다.


2) 베르나드 타피에 경영 이후 ~ 현재까지(1990~2014)

아디다스를 창립한 아돌프 다슬러 가문의 가족 경영 체제를 대체하고 큰 재정 문제에 빠진 아디다스를 살리기 위해 1990년 전문 경영인 베르나드 타피에(Bernard Tapie)가 새로운 CEO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창립자 아돌프 다슬러와 더불어 현재의 아디다스를 만든 장본인이다.


1990년대 이후 아디다스는 비약적인 재도약을 했다. 베르나드 타피에는 아디다스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는 미국의 힙합 그룹 런 디엠시(Run DMC)와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다. 런 디엠시가 아디다스의 간판 스타로 등장하면서 아디다스는 그동안 숙제였던 스트리트 스포츠웨어(Street Sportswear)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런 디엠시가 불렀던 ‘My adidas’는 히트를 쳤고, 당시 런 디엠시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중절모와 아디다스 운동화는 전 세계 힙합퍼(Hiphoper)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됐다. 아디다스가 제작한 런 디엠시 라인의 시그니처(Signature) 제품들은 전 세계로 팔려나가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 나이키(Nike)에게 벌어준 만큼의 수익을 아디다스에게 안겨주었다. 아디다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삼선 트레이닝 복을 비롯한 아디다스 의류의 시작은 베르나드 타피에의 노력의 결과라는 평을 받고 있다.


런 디엠시와 아디다스의 콜라보레이션은 선수들을 위한 스포츠 브랜드에 국한되어 있던 아디다스의 이미지를 대중적인 브랜드로 확장시켜 주었다.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아디다스는 1997년 동계 스포츠 용품 제조사인 살로몬(Salomon)을 인수했고 회사 이름을 아디다스 살로몬(adidas Salomon)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2005년 살로몬 사업 부문을 핀란드의 아머 스포츠(Amer Sports)에 매각하면서 회사명을 다시 아디다스로 변경했다.


2001년 새로운 CEO의 자리에 오른 헤르베르트 하이너(Herbert Hainer)는 취임 첫 해 요지 야마모토(Yoji Yamamoto)를 시작으로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 제레미 스콧(Jeremy Scott)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패션을 강조하는 스타일 라인은 스포츠 경기력 향상에 초점을 둔 퍼포먼스 라인과 함께 아디다스 브랜드의 양대 사업 분야이기 때문에 헤르베르트 하이너는 감각있는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아디다스의 패셔너블(Fashionable)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다.


2006년, 리복(Reebok)을 인수해 북미 시장 점유율을 끌어 올린 아디다스는 2011년엔 아웃도어 전문 브랜드 파이브텐(Five Ten)과도 합병했다. 2013년, 아디다스는 3년에 걸친 연구 개발 끝에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신소재인 부스트(Boost)를 개발해 에너지 효율이 뛰어나고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 에너지 부스트(Energy Boost)를 런칭했고, 2014년에는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인 브라주카(Brazuca)와 함께 새로운 축구화 배틀팩(Battle Pack)을 선보였다.



연도별 아디다스의 역사


1920년

아돌프 다슬러가 어머니의 여섯 평짜리 세탁실에서 최초의 훈련화를 제작함.

1924년

아돌프 다슬러는 형 루돌프 다슬러와 함께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을 설립함.

1925년

아돌프 다슬러의 가족을 포함하여 12명이 하루에 50켤레의 신발을 생산함. 또한 아돌프 다슬러는 손으로 만든 최초의 러닝 스파이크를 개발함.

1927년

아돌프 다슬러는 하루 천 켤레의 완벽한 스포츠화 제작을 목표로 사무실을 게브뤼더 다슬러 빌딩으로 옮김.

1928년

다슬러 형제의 신발이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사용됨. 참가 선수 중 거의 50%의 선수가 다슬러 신발을 착용함.

1932년

아서 요나스(Arthur Jonath)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00m 경기에서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고 동메달을 수상함.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제시 오언스(Jesse Owens)가 다슬러 형제의 러닝 슈즈를 신고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함.

1947년

아돌프 다슬러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에서 분리 독립함.

1948년

에밀 자토페크(Emil Zátopek)가 런던 올림픽 5000m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음.

1949년

아돌프 다슬러가 ‘아디다스’를 설립하고 3스트라이프를 트레이드 마크로 정함.

1950년

아디다스는 고무 바닥에 여러 개의 주조 스파이크가 달린 세계 최초의 축구화 ‘삼바’를 생산함.

1954년

아돌프 다슬러는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교체형 축구화를 제작했고 이 제품을 신은 독일 축구 대표팀은 스위스 베른 월드컵에서 우승함.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33명의 세계 기록 수립자들이 아디다스 제품을 착용함.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의 75%가 아디다스를 착용함. 아디다스화를 신은 빌마 루돌프(Wilma Rudolph)는 무려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함.

1962년

아디다스는 3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첫 번째 트랙 슈트(Track Suits, 육상 선수의 보온복)를 선보임.

1963년

아디다스는 처음으로 축구공을 생산함. 특수 제작된 16 패널 디자인으로‘산티아고(The Santiago)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공은 국제축구연맹 FIFA가 공인한 세계 최초의 축구공이 됨.

1964년

아디다스 복싱화를 신은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가 소니 리스튼(Sonny Liston)을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오름. 이 사건은 후에 아디다스의 대표 슬로건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에 영감을 줌.

1966년

영국 월드컵 참가 축구 선수 중 75%가 아디다스 축구화를 착용함.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중 85%가 아디다스를 착용함. 밥 비몬(Bob Beamon)은 멀리뛰기에서 무려 8.35미터를 뛰어 세계 기록을 갱신함.

1970년

FIFA가 월드컵에 공인구 제도를 도입했는데, 아디다스의 텔스타(Telstar)는 멕시코 월드컵 최초의 공인구가 됨.

1972년

아디다스는 상어 가죽과 폴리아미드 (Polyamide) 앞창을 결합하여 마찰력을 높인 스피리트 신발을 개발함. 아디다스는 세 잎 모양의 로고를 1972년 올림픽에 맞춰 발표함.

1974년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가 이끄는 독일 대표팀이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고 월드컵에서 우승함.

1975년

아디다스는 스키 점프용으로 특별히 디자인된 최초의 스키화를 개발함.

1976년

아디다스의 아디스타 2000을 신고 몬트리올 올림픽에 참가한 알베르토 후안토레나(Alberto Juantorena)는 400m와 800m를 동시에 석권한 최초의 선수가 됨.

1978년

아돌프 다슬러가 78세로 작고함.

1983년

아디다스의 스탠 스미스(Stan Smith) 테니스화가 가장 많이 팔리는 스포츠화로 기네스북(Guinness Book)에 오름. 이 제품은 2013년까지 4천만 켤레 넘게 판매됨.

1984년

아디다스 제품을 착용하고 LA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총 금메달 81개, 은메달 82개, 동메달 96개를 획득함.

1986년

런 디엠시(Run DMC) 그룹이 아디다스와 콜라보레이션한 앨범 ‘My adidas’를 발표함.

1988년

안전한 경기를 위해서 발의 뒤틀림을 방지 해주는 토션 시스템(Torsion System)을 도입함. 또한 같은 해 독일의 테니스 선수 슈테피 그라프(Steffi Graf)가 아디다스를 신고 4개 대회를 석권하여 그랜드 슬램(grand slam)을 달성하고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함.

1994년

아디다스는 미국 월드컵에서 프레데터(Predator) 모델을 선보임. 아디다스의 프레데터 시리즈의 특징은 고무 패치가 신발 위에 붙어 있어, 공과 신발 사이의 마찰력을 증가시킴.

1998년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이 이끄는 프랑스 축구 대표팀이 아디다스를 신고 파리 월드컵에서 우승함.

2002년

아디다스는 아쿠아 슈즈(Aqua Shoes)인 클라이마쿨(ClimaCool)과 농구화에 최초로 적용된 쿠션 기능인 a3 시스템을 같은 해에 선보임.

2003년

아디다스는 미국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에 공식 공인구를 공급함.

2006년

아디다스는 리복을 인수함.

2010년

아디다스는 11월에 그룹 비즈니스 전략 플랜인 ‘Route 2015’를 발표함.

2011년

11월 3일, 아디다스는 아웃도어 전문 브랜드 파이브텐을 인수함.

2013년

아디다스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쿠션 시스템을 갖춘 에너지 부스트 제품을 런칭함.

2014년

아디다스는 브라질 월드컵을 기념해 새로운 축구화 배틀팩을 선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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