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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물info

금융황제 JP 모건 이야기 그리고 로스차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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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ius Specer Morgan - 출처 wikipedia

 

1838년 세계 금융의 중심지 런던에서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cer Morgan)이 로스차일드(Rothschild)의

홍보 대리인이며 미국 출신의 사업가인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의 동업자가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George Peabody - 출처 wikipedia

 

 

 

피바디은행은 영국 내 유일한 미국인 회사였기때문에 후진적이던 미국의 금융시장의 영국의 선진 금융 문화를 적용하며 자국의 금융계를

장악해나갔습니다.

 

그리고 10년뒤에 스펜서 모건이 후손이 없던 피바디의 은행을 인수한 후에 그는 회사의 이름을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상사로 바꾸게되고

로스차일드의 파트너도 되었습니다.

 

스펜서는 영국으로 가기 1년 전인 1837년에 미국에서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제이피 모건(J.P.Mogan)입니다.

 

 

 

 

제이피 모건은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Georg-August-Universität Göttingen)에서 학문을 배우고, 학업을 마친 뒤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회사 계열사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자 존은 제이피 모건 상사를 만들어 독립하였고 엄청난 부를 얻게 됩니다.

 

많은 부를 일으킨 요소중 뉴욕의 북군이 처분한 낡은 카빈소총 5천정을 한정당 3.5달러에 사들여 약간의 손을 본 다음 세인트루이스 남군에게 22달러에 되파는 거래의 뒷돈을 대기도 하였고, 전쟁통에 금을 매집하고 가격을 끌어올려 수익을 내는 식이었습니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군수물자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때문에 그는 북군과 남군에 번갈아 투자하며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미국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했고 드디어 제이피 모건의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1865년 전쟁이 끝난후부터 철도건설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는데 여기서 중요한점은 전신소가 철도역사에 부설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빠른 정보는 돈을 버는 수단이었고 철도를 장악한다는것은 전신과 정보를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제이피 모건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이피 모건은 영국으로 건너가 로스차일드가와 협력 방안을 논의하였고, 로스차일드의 미국지부인 노던증권을 설립하게 됩니다.

드디어 제이피 모건에게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규모 자금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로스차일드에게는 미국에 공식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이때 로스차일드가 제이피 모건과 함께 미국으로 보낸 대리인이 바로 쿤앤롭사의 대표이사 제이콥 쉬프입니다.

 

Jacob Schiff - 출처 위키백과

 

이말은 약 30년 뒤 발생하는 러일전쟁의 배후에도 로스차일드가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1869년부터 제이피모건의 노던증권은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활용하여 철도회사들의 지분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877년 철도왕이라고 불리는 코넬리어스 밴더빌트가 사망했을때 제이피 모건은

밴더빌트의 뉴욕 센트럴철도 주식을 월스트리트가 아닌 런던시장에서 영국 투자자들에게 상당한 금액으로 팔아내는 수완을 발휘했으며,

동시에 본인이 뉴욕 센트럴철도의 이사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은행가들이 기업의 이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후 제이피 모건은 200여개가 난립하던 철도 회사를 끊임없이 인수 합병하여 1880년대가 되어 철도 회사를 9개의 대기업으로 합병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기의 만남 토마스 에디슨과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1878년 토마스 에디슨은 가스등을 대체할 전기등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제이피모건은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곧 합작회사를 제의하고 에디슨에게 3만달러의 연구개발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1879년 10월 21일 에디슨은 약속대로 백열등을 발명하였고, 1882년에는 뉴욕에서 세계 최초로 중앙화력발전소가 건설되었습니다.

 

제이피모건(J.P.Morgan)은 추가로 회사에 30만 달러를 투자했고, 그중에서 25만달러 상당의 주식을 에디슨에게 주고

에디슨에 백열전구 특허권을 사게됩니다.

 

1880년대 말 1천 5백 시간을 견디는 16w 전등이 만들어져 시장에 나왔고, 제이피 모건은 또 한번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제이피 모건은 평생동안 1천여개의 발명품을 쏟아낸 에디슨을 통해 엄청난 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벤처 캐피탈리스트 였던겁니다.

 

전등과 발전소가 에디슨에게 발명되었다면 그것을 실용화하여 대량으로 공급될 수 있었던 것은 제이피 모건의 자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1907년 10월 21일 월스트리트는 구리광산 주가의 대폭락을 신호탄으로 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부는 이에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월가의 은행가들이 구조를 요청한 것은 바로 제이피 모건이었습니다.

 

그는 주요 금융인들을 불러 개별 행동을 금지시킨후 투신사와 은행의 구제 계획을 내놓게됩니다.

그리고 자기 은행을 포함한 몇몇 은행에서 실제금리를 파격적으로 끌어내린 10%의 조건으로 긴급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100% 금리에도 돈을 빌릴 수 없었던 시기에 10%금리를 제공해준 제이피 모건은 신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금이 떨어진 증권거래소를 지원하였고, 공무원에게 월급 줄 돈마저 떨어진 뉴욕시를 도왔으며 

다른 투신사를 설득하여 구제기금을 만드는 등 정부를 대신하여 공황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경기침체는 멈추게 됩니다. 이렇듯 중앙은행이 없던 시절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은

제이피 모건이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13년 제이피 모건은 로마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1년뒤인 1914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잭 모건은 전쟁이 다시한번 부를 축적할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John Pierpont “Jack” Morgan Jr. -출처 findagrave.com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에게 전시 자금조달을 한 것입니다. 

그외 여러가지 일을 하였지만 기억할 것은 그가 영국 정부가 가지고 있던 미국 채권을 월가에서 팔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총 30억달러가 넘는 거금이었고 이 과정에서 잭 모건은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미국과 영국은 채권채무국 관계가 역전 되었습니다.

게다가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은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재건에 필요한 자금이 절실했고 유럽 각국의 정부와 기업들은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뉴욕 월스트리트가로 몰려갔습니다. 반면 영국은 자신들의 자본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본유출을 막습니다.

 

이로써 런던의 '더 시티'는 과거의 위상을 뉴욕의 '월스트리트'로 넘겨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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